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러시아 혁명 (문단 편집) === 혁명 이전(1900 ~ 1917) === [[블라디미르 레닌|레닌]]은 형기가 끝나고 출소하자마자 [[런던]]으로 망명하여 마르토프, 플레하노프와 함께 혁명적 공산주의 신문 <이스크라[* '불꽃'이라는 뜻의 러시아어 단어]>를 창간했다. 그러나 [[1903년]], [[런던]]에서 열린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제2차당대회에서 분열이 일어났다. 표면적인 원인은 <이스크라>의 편집진을 누구로 구성할 것인가 였지만 실은 혁명노선의 차이로 인한 대립이었다. 레닌은 혁명은 오로지 노동자와 소수의 직업혁명가에 의해서만 추진되어야 하며 무장봉기와 [[프롤레타리아 독재]]만이 제정을 타도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에 반해 마르토프는 폭력적인 방법이 사용되어서는 안 되며 서유럽의 [[사회주의]] 정당처럼 대중적이고 개방적인 정당의 필요성을 역설했고 소(小)부르주아도 정당에 포함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결국 두 사람의 안건은 투표에 부쳐졌고, 결과에 따라 레닌의 파벌은 다수파라는 뜻의 '[[볼셰비키]]', 마르토프의 파벌은 소수파라는 뜻의 '[[멘셰비키]]'로 불리게 되었다.[* 하지만 다음 대회에서는 다시 뒤집혀 멘셰비키가 다수였고 볼셰비키가 소수였다는 것이 아이러니하다. 실제 세력에 있어서도 온건 노선을 추종한 멘셰비키가 더 컸다.] 이 두 파벌은 한동안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안에서 불편한 동거를 하게 되었지만 결국 [[1912년]] 프라하 대회에서 레닌은 멘셰비키와 완전히 결별하고 볼셰비키당을 만들었다. || [[파일:external/www.library.yale.edu/mart.gif|width=100%]] || || 멘셰비키의 지도자 '[[율리 마르토프]]' || 한편 러시아 국내에서는 [[20세기]]에 접어들어면서 노동자들의 정치파업과 시위가 더욱 격화되고 있었다. [[1901년]] 2~3월 동안 [[상트페테르부르크]], [[모스크바]], [[키이우|키예프]], [[하르키우|하르코프]] 등지에서 수만의 시위대가 '전제 타도'의 기치를 내걸고 가두행진을 벌였으며 같은 해 7~8월의 남러시아 노동자 총파업에는 20만의 노동자가 참여해 [[차르|황제]]의 권력에 정면으로 도전하였다. 정부는 탄압을 병행하는 동시에 노동자들을 혁명에서 분리하려는 정책을 썼다. 노동자 사이에 간첩을 투입하거나 관제노동조합을 설립하기도 했으며 '오흐라나'라고 불리는 비밀경찰을 운영했다. 그러나 노동자들의 투쟁은 탄압이 심해질수록 오히려 불붙을 뿐이었다. [[1901년]] 이러한 투쟁을 바탕으로 러시아에서 '사회혁명당(SR)'이 결성됐다. 사회혁명당은 기관지 <혁명 러시아>를 발간하여 전제정권에 대해 투쟁을 열망하지만 정치적으로 자각되지 않은 사람들 사이에서 큰 영향력을 발휘했다. 또 이들은 테러를 통해 전제정권과 투쟁할 것을 주장하며 당 전투단을 조직했고 반동적인 관료들을 암살하면서 차리즘에 저항하였다. [[러일전쟁]]이 발발한 1904년 무렵 유럽의 자유주의 흐름은 거세어져서 옆나라 [[독일 제국]]이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마저 헌법을 제정하고 의회를 설치하고 전제군주의 힘이 강하더라도 외견상 입헌군주제를 유지하였다. 마침 전쟁 때문에 인플레가 일어나고 전쟁을 이유로 수탈이 심해지자 도시의 임금 노동자들에게 치명타로 작용했다. 불만을 품은 자유주의자들은 1905년, 전제정을 타파하고 현대적 인권, 노동권, 기본권 등의 개념이 담긴 헌법을 제정하고 의회를 설치할 것을 요구했고 농민과 노동자들도 열악한 경제 상황을 개선시켜 줄 것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다. 하지만 그들의 요구에 돌아온 것은 [[피의 일요일 사건|황제의 총칼뿐이었다.]] 농민과 노동자들은 [[피의 일요일 사건]]으로 큰 충격을 받았고 수백 년간 러시아 국민들의 머릿속에 뿌리깊게 박혀 있었던 황제 숭배 사상이 일시에 무너져내렸다. 이전에는 단순히 차리즘, 즉 전제정에 반하는 것이 투쟁의 목적이었지만 이 사건 이후 혁명은 군주정을 아예 부정하고 황제의 퇴위를 요구하는 방향으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여름까지 농민들은 전 러시아의 1/5를 장악했고 가을에는 절반을 점령하는 기염을 토했다. 노동자들과 농민들의 투쟁은 전제정권의 기둥이었던 군대마저 흔들어 놓았다. 러일전쟁의 패전과 혁명 세력의 공작이 군대의 동요를 가속화했다. 결국 6월 전함 [[포템킨]]에서 [[포템킨 반란|수병들이 반란을 일으키면서]] 이 같은 우려는 현실이 되었다. 비록 반란은 실패했으나 노동자와 군대의 결합이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있으며 이는 훗날 2월 혁명이 성공하는 데 가장 큰 밑거름이 되었다. 결국 [[니콜라이 2세]]는 더 이상의 혼란을 막고 군주정을 지키기 위해 1905년 [[https://ko.wikipedia.org/wiki/10월_선언|10월 선언]](Октябрьский манифест)을 발표하였다. 입법권을 가진 [[두마]](국회)[* 당시 내무부 장관이었던 [[https://en.wikipedia.org/wiki/Alexander_Bulygin|알렉산드르 불리긴]]이 제안하여 '불리긴 두마' 라고 불렸다.]의 개설, 헌법 제정, 투표권 확대를 약속하였으며 언론·출판·결사·조합 결성의 자유·인권보장이 발표되었다. 11월에는 두마 선거법이 공포되었다. 그러나 공포된 선거법은 많은 국민들에게 선거권을 부여하지 않았다. 여성은 물론 25세 미만, 군인, 학생, 종업원 50인 미만의 소기업 노동자, 일용직 노동자, 소규모 수공업자, 농업 노동자에게는 선거권이 없었다. 선거권이 주어진 사람들도 불평등이 심했다. 국민 전체를 지주, 도시민, 농민, 노동자의 네 등급으로 나누어 등급별로 선거인을 선출했는데 선거인 1명을 선출하는 사람 수가 각각 달랐다. 지주의 1표는 도시민의 2표, 농민의 15표, 노동자의 45표에 해당했다.[* [[1907년]]에는 지주의 1표가 대자본가의 4표, 중산층의 65표, 농민의 260표, 노동자의 540표에 해당되도록 변경되어 더욱 더 불평등이 심화되었다.] 1906년에는 헌법이 공포되고 전제군주가 두마(하원)와 국가평의회(상원)의 협조를 얻어 입법권을 행사하는 [[입헌군주제]]가 선언되었다. 그러나 [[차르|황제]]가 여전히 행정과 군사, 외교 등의 실권은 물론 법률 거부권, 비상시 입법권, 두마 해산권까지 장악하고 두마에서 통과된 법안은 황제에게 충성하는 국가평의회의 인준을 받아야 하는 '[[사이비]] 입헌 체제'였다. 무엇보다 [[니콜라이 2세]]는 공식적으로 전제군주로서의 직함을 포기하지 않았다. ||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The_Russian_Revolution%3B_Third_State_Duma_of_the_Russian_Empire_Q81557.jpg|width=100%]] || || 10월 선언으로 개설된 두마의 모습. [[니콜라이 2세]]의 사진이 눈에 띈다. || 또한 총리를 맡았던 [[표트르 스톨리핀]]이 경제운용에 있어서 제법 유능했던 인물이었기 때문에 그의 개혁 아래에서 농업 생산성은 크게 향상되었고 중산층들이 어느 정도 육성되면서 경제는 차츰 안정을 찾았다. 그 '''[[블라디미르 레닌]]'''이 (스톨리핀의 개혁 때문에) '''"혁명은 글렀다"'''고 한탄할 정도였다. 그러나 스톨리핀은 암살당하였고 니콜라이 2세도 긴장감이 풀면서 [[그리고리 라스푸틴|라스푸틴]]을 감싸고 돌던 와중에 [[제1차 세계 대전]]이 터졌다. 초기 [[슬라브]] [[민족주의]]에 고무된 러시아 민중은 황제를 지지하며 [[독일 제국]]과의 전쟁에 참전하였다. 그러나 독일 제국은 예상 외로 강력했으며 [[타넨베르크 전투]]에서 12만 5천 명의 [[러시아 제국군]]이 전사하면서 패퇴하고 1915년 초여름 [[프리비슬린스키|러시아령 폴란드]]의 수도 [[바르샤바]]가 함락되었고 [[벨라루스|벨로루시]]와 발트해 연안까지 [[독일 제국군]]이 진주하는 등 오히려 러시아가 열세에 놓이는 상황에 이르게 되었다. 러시아 제국이 모든 물자와 병력을 [[몰빵]]하여 준비한 [[브루실로프 공세]]까지 [[영 좋지 않은]] 결과로 종결되자 러시아에선 차츰 혁명적 정세가 조성되기 시작하였다. 1916년 말까지 러시아는 900만의 병력을 투입했지만 무려 500만의 병사가 죽거나 부상당했다. 게다가 경제 상황이 좋지 않았을 때 전쟁에 참여했기 때문에 막대한 전비를 감당하지 못해서 러시아 정부는 전비의 충당을 위해 막대한 양의 [[루블]]을 찍어냈는데 이로 인해 화폐가치가 하락했으며 물가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게 되었다. 특히 빵을 비롯한 생필품의 물가는 엄청나게 치솟았다. 나중엔 거의 모든 국민이 전쟁을 혐오했고 반전 감정은 차리즘에 대한 반발로 이어졌다. 노동운동도 다시 급격히 고조되어 1916년에 100만 명 이상의 노동자가 파업에 참여했고 전쟁터에서도 병사들의 탈영과 [[프래깅]]도 빈번해졌다. 1917년 들어서는 파업이 더욱 빈번해져 1월에는 25만, 2월에는 40만의 노동자가 참여했다. 이를 진압해야 할 군대까지 전쟁에 지치면서 진압을 거부하고 파업에 호의적으로 반응하기까지 했다. 1917년 초 [[상트페테르부르크|페트로그라드]]는 점점 무정부 상태에 빠지고 니콜라이 2세와 정부는 상황을 수습할 능력을 잃어버렸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